숭례문 구간

 

♣ 동영상을 보고 구간의 순성 계획을 세워봅시다.

   동영상을 따라 이동해 보아도 좋아요. 약 3시간 코스를 22분 7초 영상으로 만들어서 매우 빠르니 중간 중간에 일시 정지를 누르면서 따라가 보세요. 중요 부분에 도착하면 자막으로도 표시를 해주고 있어요.

♣ 숭례문 구간 (간단 설명)

☞ 남산(목멱산) 구간:  백범광장 ~ 돈의문 터, 1.8km
   * 백범광장-숭례문-남지 터-대한·서울상공회의소-소의문 터-배재학당동관·배재공원-러시아대사관-창덕여중-돈의문 터(돈의문박물관마을)
☞ 소요 시간: 약 1시간
☞ 난이도: ★☆☆☆☆
☞ 개방 시간: 24시간 

♣ 숭례문(崇禮門)

   숭례문(崇禮門)은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의 4대문(大門) 중의 하나로 남쪽의 대문이죠. 흔히 남대문(南大門)이라고도 부르는데, 조선 초기부터 불린 이름이에요.

   서울 4대문 및 보신각(普信閣)의 이름은 오행사상을 따라 지어졌어요. 이런 명칭은 인(仁: 동), 의(義: 서), 례(禮: 남), 지(智: 북), 신(信: 중앙)의 5덕(五德)을 표현한 것이었으며, 숭례문의 '례'는 여기서 유래한 것으로, 유교 덕목 중 예의를 소중히 여긴다는 ‘예(禮)’를 넣어 이름을 붙였어요.

   숭례문은 도성의 정문의 역할을 했어요. 외국의 사신이 오면 이곳에서 예의를 다해 맞았고, 나라의 큰 행사를 할 때 의장 행렬이 이 문을 통해 갔으며 전쟁터에 나가는 군사를 배웅하기도 하였고 중국으로 가는 사신을 배웅하기도 했지요. 왕의 장례 행렬도 숭례문을 통해 나갔어요.

   숭례문의 편액은 《지봉유설》 기록에는 양녕대군이 썼다고 알려져 있으나 여러 가지 의견들이 있어요.

   중앙에 홍예문이 있는 기반 위에 지어진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건물이에요. 홍예문에는 철이 덧씌워진 큰 문이 양쪽으로 달려 있지요. 기단 위로는 얕은 담을 두르고, 좌우 양쪽에는 작은 문과 계단이 있어 드나들 수 있게 하였어요. 전형적인 다포형식의 건물이라고 해요.

♣ 남대문시장과 칠패시장

   남대문시장은 1897년 1월에 개장한 한국 최초의 도시 상설시장이에요.

   조선 초에는 이곳에 상평창이 있었는데, 17세기 대동법 시행을 계기로 선혜청 창고로 바뀌었어요. 1894년 조세금납화 조치에 따라 현물을 보관할 필요가 없어지자 이 창고를 상인들에게 내 주어 시장으로 삼았어요.

   남대문 밖에는 칠패(七牌) 시장이 있어 종루(종로4거리), 이현(흥인지문 안)과 더불어 조선 후기 3대 시장 중 하나로 꼽혔어요. 칠패라는 명칭은 이곳이 어영청 제7패의 순라길이었던 데에서 비롯되었어요. 

♣ 대한·서울상공회의소 부근 성벽

   대한·서울상공회의소 부근에 성벽 일부가 담장처럼 남아 있어요. 1907년 한양도성의 본격적인 철거는 여기에서부터 시작했어요.
   여장은 물론 체성조차 흔적을 찾을 수 없게 훼손되었는데, 최근 옛 성돌의 흔적 위에 새로 몇 단을 쌓아 올렸어요.

♣ 소의문 터 (昭義門)

   소의문(昭義門)은 사소문 중 하나로 도성의 서남쪽에 있는 문이에요. 1396년 도성과 함께 축조되었으며 처음 이름은 소덕문(昭德門)이었어요. 영조 20년(1744) 문루를 개축하면서 소의문으로 이름을 바꿨어요.
   광희문과 함께 성 밖으로 상여를 내보내던 문이었어요. 1914년 일제의 시구개수사업 과정에서 헐려 지금은 소의문 터였음을 알리는 표석만 남아 있어요.

  * 소의문은 공포의 문이었다?
   소의문은 광희문과 함께 도성 밖으로 상여를 내보내던 문이었어요. 소의문은 사형수를 처형장으로 끌고 나갈 때에도 사용되었어요. 소의문 밖 넓은 마당은 조선시대 사형 집행장이었지요. 천주교 순교자들 다수도 이 문 밖에서 처형당했기 때문에 외국인들 사이에서는 순교자의 문으로도 불렸어요.
   현재 서소문역사공원 안에 있는 순교자 현양탑은 이와 관련한 기념물이에요.

♣ 배재학당동관(배재학당 역사박물관)

  배재학당동관은 <기념물 제16호>에요. 1916년 준공된 배재학당동관은 현재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어요. 
   배재학당은 1885년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가 설립한 학교로서 1886년 고종이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어요. ‘유용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라는 뜻이지요.
   초창기 배재학당은 미국 문물 교류의 통로로서 수많은 근대 지식인을 배출하였어요. 이승만·주시경·김소월·나도향·오긍선·신봉조 등이 이 학교 출신이에요.

♣ 구 러시아공사관

   구 러시아공사관은 <사적 제253호>이에요.
   고종 27년(1890)에 완공된 르네상스식 건물로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정동의 상징적 건축물이었어요. 을미사변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끼던 고종이 1896년 2월 이곳으로 피신해 1년 간 머물렀었지요(이를 '아관파천'이라고 해요).
   한국전쟁 중 건물 대부분이 파손되어 탑 부분만 남았어요. 1973년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했으며 2007년과 2010년 두 차례에 걸쳐 보수하였어요. 구 러시아공사관 터는 현재 정동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어요.

♣ 정동교회

   정동교회는 <사적 제256호>이에요.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기독교 감리교회이에요. 고딕풍의 붉은 벽돌 건물로 1895년에 착공하여 1897년에 완공하였어요. 인근의 배재학당 · 이화학당과 더불어 개화기 미국 문물 도입의 통로 역할을 하였어요.

♣ 이화여자고등학교 심슨기념관

   이화여자고등학교 심슨기념관은 <등록문화재 제3호>이에요.
   1915년에 준공된 옛 이화학당 교사(校舍)로 현재 이화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어요.
   이화학당은 1886년 미국 감리교 여선교사인 메리 스크랜튼이 창설한 한국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으로, 이화학당이라는 이름은 1887년 왕후가 지어준 것이에요. 학교 경내에 유관순 열사가 빨래하던 우물터와 ‘한국여성 신교육의 발상지’ 기념비, 유관순 동상, 손탁호텔 터 표석 등이 있어요.
*사진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창덕여자중학교 담장

   창덕여자중학교 담장은 한양도성 훼손은 증거이에요. 돈의문과 주변 성곽은 일제강점기 시구개수사업(1915) 과정에서 훼손되었는데 창덕여자중학교 담장에 일부가 남아 있어요. 담장에는 ‘서대문 성벽의 옛터’라는 안내문이 있고, 담장 아랫부분에는 19세기 초 순조 때 쌓은 성벽이 50m 정도 이어져 있지요1. 이곳은 개화기 프랑스공사관이 있던 자리로 1896년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옛 프랑스공사관 건물의 머릿돌이 남아있어요.

♣ 돈의문 터

    돈의문(敦義門)은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의 4대문(大門) 중의 하나로 서쪽의 대문이죠. 흔히 서대문(西大門)이라고도 부르는데, 조선 초기부터 불린 이름이에요.
   돈의문은 태조 때 처음 세워졌으나 태종 13년(1413)에 만들어진 서전문(西箭門)이 서대문의 기능을 대신하였어요. 그 위치는 현재 정확히 알 수 없어요. 세종 4년(1422)에 도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면서 서전문을 닫고 새로운 돈의문을 세웠는데 현재 돈의문 터가 그 위치에요. 

   서울 4대문 및 보신각(普信閣)의 이름은 오행사상을 따라 지어졌어요. 이런 명칭은 인(仁: 동), 의(義: 서), 례(禮: 남), 지(智: 북), 신(信: 중앙)의 5덕(五德)을 표현한 것이었으며, 돈의문(敦義門)의 '의(義례)'는 여기서 유래한 것으로, 유교 덕목 중 ‘불의를 부끄러워하고 악한 것은 미워하는 마음’인 의(義)를 넣어 돈의문이라 지었어요. 의(義)를 북돋는 문이라는 뜻이지요.

   돈의문(敦義門)은 ‘새문’, ‘신문’이라고도 불렸어요. 인근의 ‘새문안로(신문로)’나 '새문안교회' 등의 이름은 여기서 따온 말이지요. 
   
   돈의문(敦義門)은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일제는 서대문을 지나는 전차를 개통하면서 이 문을 해체하여 건축자재로 매각하였어요.
   현재 돈의문 터에는 공공 미술품 ‘보이지 않는 문’이 설치되어 있어요.
   그리고 2019년 8월, 104년 만에 디지털로 복원하고, 서울 돈의문박물관마을 내 돈의문체험관에서 AR‧VR로 돈의문의 옛 모습을 체험할 수 있게 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