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은 조선시대에 꾸준히 정비되고 보수되어 왔어요.
일제 강점기 동안 한양도성은 매우 많이 훼손되었고, 광복 이후 6.25 전쟁과 무분별한 도시화로 인해 훼손되었지요.
1975년부터 계속하여 서울 한양도성 복원 사업이 이뤄지면서 조금씩 제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어요.
한양도성의 훼손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한양도성을 보존해가야 하는지 함께 살펴봐요.
일제 강점기 일제 침략으로 궁궐을 가장 먼저 파괴하고 왜곡하였다. 경운궁이 덕수궁으로 이름도 바뀌었고, 창덕궁에 붙어있던 창경궁은 창경원으로 바뀌었어요. 경복궁은 조선총독부 건물이 들어서게 되었어요. 이와 함께 한양도성도 훼손되었지요.
1. 임오군란(1882년)을 계기로 도성 안에 외국 군대가 주둔하면서 도성을 중국 상인들에게 개방하게 되었어요.
2. 정부의 군제 개혁으로 삼군문이 해체되어 도성 관리도 허술해지게 되었지요.
3. 1985년부터 통상조약을 체결한 모든 나라의 상인들에게 도성을 개방하였어요.
4. 도성 안에 외국 공관, 종교 시설, 교육 시설들이 들어서면서 성벽 바로 옆에 지은 것이 많았고, 성돌을 건축 자재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5. 1899년 5월 19일, 서울에 전차가 다니기 시작하면서 도성은 심하게 훼손되기 시작해요. 종로에서 청량리 사이에 놓인 전차 궤도는 흥인지문 안을 통과했고, 이어 숭례문과 돈의문 안에도 전차 궤도가 놓였어요. 이리 되어 성문을 열고 닫는 일이 사라졌어요.
◈ 동대문(흥인지문) 전차 운행 모습
일제강점기 경성(京城)의 전차 운행 모습을 흑백으로 촬영한 사진엽서예요. 엽서 하단에 촬영 장소를 영어와 일어로 적혀있어요.
출처: 한양도성 아카이브
6.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성벽은 국가 관리 대상이자 보호 대상이었고 성벽을 훼손하는 행위는 엄격하게 금지하였어요.
7. 1904년 러일전쟁 직후 서울을 점령한 일제는 '한일의정서'와 '을사늑약' 등을 강요하여 우리나라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확보하였요.
8. 1905년 경부-경의 철도가 완공되어 남대문정거장이 한반도의 중심역이 되자 일제는 숭례문 주변 성벽을 헐어 새 도로를 내야 한다고 요구했어요. 1907년 3월 30일,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의정부 참정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권중현이 허수아비 신세였던 고종에게 요청합니다.
"문루의 좌우 성첩을 8칸씩 헐어 전차가 드나들 선로를 만들고..."
이미 권력을 다 빼앗긴 고종은 이를 허락할 수밖에 없게 되었지요.
9. 1907년 6월 22일,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임선준, 탁지부대신 고영희, 군부대신 이병무가 고종에게 또 요청합니다.
"나머지 성벽은 교통 중심 도록에 있어 장애가 되고 유사시를 방비하는 데 유익할 것이 없으니 헐어버려야..."
10. 이후 도로에 인접한 평지 구간의 한양도성 전체를 헐어버리는 방침이 정해졌지요.
11. 1907년 7월 20일,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이 강제로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순종이 왕에 올랐어요. 일제는 축하 인사를 전한다는 명목으로 황태자 가인을 대표로 하는 사절단을 보내기로 결정했어요. 일제 황태자의 방한을 앞두고 통감부는 친일 인사들에세 '한성부민회'를 조직하게 하고 도시 청소 작업을 맡겼어요. 일제 헌병과 경찰들은 전염병 발생 여부를 면밀히 조사하여 환자로 의심되는 사람은 바로 격리했어요. 위생상 문제를 제거하기 위해 숭례문 밖 남지(南池)와 동대문 안의 연지(蓮池)를 메꾸었어요.
12. 대한제국 군대 해산식이 거행된 8월 1일 내각령 1호로 이완용 이름으로 '성벽처리위원회에 관한 건'을 공포하였어요. 이때부터 성벽처리위원회 주관 하에 조직적으로 성벽 철거 작업을 진행해요. 일본 황태자 방한 직전인 1907년 10월 초 남대문을 좌우로 감아도는 대로가 완공되었고, 이에 앞서 숭례문 좌우 성벽이 모두 철거 되었지요.
13. 일제의 성벽처리위원회는 1908년 3월부터 흥인지문 북쪽의 성벽과 오간수문, 숭례문 남쪽의 성벽을 철거해요.
14. 철거한 성돌을 일본인들에게 건축 자재로 팔아넘길 계획까지 세웠어요. 그러나 군대 해산 직후 성벽까지 팔아넘기는 것은 민심을 지나치게 자극할 우려가 있다고 하여 잠시 철회했어요.
15. 1908년 9월 서소문 부근의 성벽 77칸과 남대문 부근 성벽 77칸을 철거한 뒤 폐지되었고, 이후 성벽 철거 업무는 내부 지방국과 토목국이 맡게 되었어요,
16. 1910년 8월 우리나라의 주권을 강제로 빼앗은 일제는 1914년 소의문, 1915년 돈의문을 헐고, 그 문루와 석재를 건축 자재로 팔았어요.
競賣毁撤에 附한 西小門
- 길 넓히기 위하여 헐어버리는 서소문, 서대문도 역시 길 넓히기 위하여 회철
총독부 토목국 조사과에서는 이번에 도로를 정리하기 위하여 경성 서소문을 무너버릴 차로 12월 2일에 경매 입찰을 시행한다는데, 당사자의 말을 들은즉 서소문과 같은 것을 시내 각 처에 남겨두면 그것을 보전하기에 불소한 경비가 들 뿐 아니라 교통하기에도 극히 불편하고 서소문은 남대문과 같이 문 양편의 성을 헐고서라도 문은 보전하여 둘 만한 가치가 없음으로 이번에 그 문을 무너버리고 도로를 넓히려는 계획이라. 그러함으로 도로를 넓혀 통행을 편리하게 함은 다만 서소문뿐이 아니라 불원하여 서대문도 무너버릴 터이라 하니 과연 당사자 하는 말과 같이 서소문은 남대문과 같지 못하여 역사상으로 말하던지 또는 건축학상으로 말하던지 큰 가치가 없으나 오늘날까지 경성의 성문으로 여러 사람이 서소문, 새문하던 이름이 전하여 내려오다가 하루아침에 그 문을 없이 한다는 말을 들으매 자연히 애석한 마음이 일어남을 금치 못하겠으나 교통의 편리를 위하여 그럼인즉 할 일 없으며 물형 그린 석물과 현판 등 물은 팔지 아니하고 기념으로 영구히 총독부에서 보존하여 둔다더라.
매일신보(1914. 11. 25. 3면 5단) *출저: 한양도성 아카이브
賣物된 西大門-6일에 경매 집행
총독부에서 이전부터 경성의 서대문(새문)을 헐어 팔 의논이 있음은 이미 보도한바 오는 6일 오전 10시 총독부 토목국 조리과에서 경매 입찰을 행하기로 결정하였는데, 경매로 팔 것은 서대문의 목재와 기와뿐이오 돌은 하나도 팔지 않고 도로개정에 쓴다더라.
매일신보(1915. 3. 2. 3면 4단)
출저: 한양도성 아카이브
西大門의 落札 二百五圓
-6일에 경매한 새문 목재만 이백오원에
시구의 개정으로 인하여 경성 서대문(西大門)을 헐기로 결정하고 총독부 토목국 조리과에서는 6일 오전에 경매 입찰을 행하야 입찰자 10여 명 중에서 결국 205원 50전으로 경성 염덕기(廉德基)에게 낙찰되었는데 본래 경매한 것은 거의 목재뿐이오 석재는 이것을 도로의 개수에 사용하고 또 고고학(考古學)상에 참고할 자료될 부속물은 총독부에서 영구히 보존 한다더라
매일신보(1915. 3. 7. 3면 3단) * 출저: 한양도성 아카이브
17. 소의문과 돈의문 다음으로 광희문의 훼철도 진행되었어요. 1914년 광희문의 북쪽 성벽은 이미 잘려나갔어요. 1928년부터는 문 자체를 없애려고 했어요.
光熙門樓上에 凍死體
- 아편중독자로서
- 굶고 추워서 죽어
재작 26일 오전 2시경에 시내 광희문루상(光熙門樓上)에 어떤 24~5세 되어 보이는 조선 청년 한 명이 얼어죽었는데 그는 아편중독자로 경성시내를 배회하던 자이며 원인은 먹지도 못하고 잘 입지도 못한 후 전기의 장소에서 자다가 요사이 맹렬한 새벽일기에 그만 견디지 못하여 필경은 죽어버린 것이라더라
*출처: 동아일보 1921. 12. 28. 3면 8단
흥인지문에서 오간수문(五間水門)을 지나 남산 쪽으로 성벽을 따라 내려가면, 광희문이 자리하고 있다. 한양도성의 동남쪽에 위치한 이 소문(小門)은 한강과 통하는 문이라 하여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민간에서 부르던 또 하나의 이름이 있었으니 바로 시구문(屍口門)이다. 소의문(昭義門)과 함께 조선시대 도성 밖으로 시체를 내보내던 문이라 하여 광희문에 붙은 이름이다. 시체가 드나들던 문이었기 때문일까. 일제강점기 경성부(京城府)의 대표적인 빈민촌 중의 하나가 바로 광희문 밖이었다. 1920년대 매일신보와 동아일보에 실린 동사(凍死) 혹은 아사자(餓死者)에 대한 기사는 당시 빈민 계층의 비참했던 생활상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일제의 식민통치 아래에서 1910년 이후 나타나기 시작한 도시로의 인구집중은 도시빈민 문제를 가져왔다. 조선총독부는 빈민계층을 크게 세민(細民), 궁민(窮民), 부랑민, 거지(걸인)의 네 가지 범주로 나누었는데, 구차하지만 남의 도움 없이 생계를 겨우 유지하는 계층이 세민, 외부의 도움(구제)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한 계층이 궁민, 일정한 주소나 직업이 없는 계층이 부랑민, 그리고 이들 중 가장 빈곤한 층으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모르는 사람을 상대로 구걸하는 계층이 거지였다. 이들의 주거지는 산비탈이나 하천가, 그리고 성벽주변에 마련한 토막이나 불량주택이었고, 광희문 밖 빈민촌도 그러한 방식으로 형성된 지역이었다. 한겨울의 매서운 한파 속에서 걸식(乞食)하며 거리를 헤매다가 광희문 문루에서 결국 추위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한 이들은 아편중독자와 폐결핵환자, 걸인 등 다양한 부류였지만 모두 신원과 주소지를 확인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아 일정한 주거지를 가지지 못한 자들, 즉 빈민층 가운데에서도 궁민 이하, 부랑민이나 거지로 분류되는 사람들이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도성 안에서 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나가던 문(屍口門)에서 빈민 계층이 죽음을 맞이하는 그야말로 시체의 문(屍軀門)이 된 것이다.
*출처: 한양도성 아카이브
하여간 광희문은 1928년 7월에 팔려 나갔다. 그런데, 그 이후에도 광희문에 대한 기사들이 많이 나온다. 헐려 없어졌다면서 그대로 있는 것처럼 이야기 하니 도대체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무리 찾아봐도 일제강점기 자료에는 광희문의 모습을 알려주는 기사는 더 이상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다가 1962년 10월 10일 <동아일보>에 다시 광희문이 임종을 맞았다는 기사가 보인다.
*출처: 홍순민(2017), 홍순민의 한양읽기 도성, pp.360-361.
18. 1928년 7월 12일 매일신보 기사에는 혜화문과 광희문이 경매에 부쳐져 헐렸던 것으로 되어 있으나, 1929년 방치되었던 혜화문의 문루가 붕괴되었고, 도로 확장을 핑계로 1938년 5월 25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혜화문이 헐렸다는 기사가 있어요. 혜화문을 헌 이유는 혜화문 밖 일대가 개발되면서 폭 24m의 도로를 내기 위해서였어요.창경원에서 시작하여 혜화문을 통과하여 공성상업학교까지 구간의 전차개 1939년 4월 15일 개통하게 되어요.
*사진 자료 출처: https://blog.naver.com/nahasa1/60155273775
19. 1930년대 말에 도성의 문들 중 숭례문, 흥인문, 창의문 만 남고, 소의문, 돈의문, 혜화문이 없어졌어요. 광희문은 문루는 없어지고 육축만 남았고요. 숙정문은 조선 중기 문루가 없어진 상태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지요.
20. 남산(목멱산)은 조선 시대부터 서울의 주산이었어요. 남산에 신을 모시는 국사당을 세우고, 국가가 직접 제사를 지냈지요.그런데 일제 조선총독부는 한국인들 사이에 일본 토속 종교인 신도(神道)를 침투시키고자 국사당을 헐고 '조선신궁'과 참배로를 만들면서 남산 주변의 성벽이 대거 훼손하었어요. 이후 일제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면서 황국신민의 서사를 외우게 하는 등 내선일체를 주입하는 정책을 펴나가요. '창씨개명'이라 하여 우리 이름도 모두 일본식 성과 이름을 갖도록 강요하였어요.
20. 흥인지문과 광희문 부근의 평지에 남아있던 성벽도 헐렸어요. 1926년 일본 황태자의 결혼식을 기념하여 경성운동장을 지으면서 흥인지문과 광희문 부근의 남아 있던 성벽과 이간수문을 헐었어요. 성벽 하단부의 석재는 관중석의 기초로 사용했어요.
1. 서울의 인구가 증가하면서 주택 수요가 급증하였어요. 조선시대 도성 안에서 궁궐을 굽어보는 위치에 집을 지을 수가 없었어요. 백성이 왕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조선 왕조가 망했기에 내사산의 성벽 주변에 먼저 빈민층의 무허가 주택인 토막(움막집)이 들어 서기 시작했어요. 일제 조선통독부도 이 땅들을 택지로 분할해 팔았지요. 도성 안이든 밖이든 성벽에 인접한 곳은 모두가 택지가 되었고, 이곳에 집을 짓는 사람들은 주저하지 않고 성돌을 건축 자재로 이용했던 거지요.
2. 1936년 '경성부 확장'으로 인해 '경계선으로서의 의미'였던 성벽은 그 의미를 잃었어요. 조선총독부는 경성을 대륙 침략의 전초기지로 개발하고 인구 증가에 대비하기 위해 경성부의 면적을 크게 확장했어요. 강남과 영등포가 경성부에 포함되었고, 이태원, 신당리, 미아리, 아현리, 신설리 등의 공동묘지와 주뱐 지역들이 새로운 택지로 개발이 되었어요. 성 밖으로 나가는 도로도 확장되면서 많은 성돌이 건축 재료와 토목 공사 재료로 상용되었어요.
3. 1933년 12월 5일, 조선총독부는 '조선보물고적명승기념물보존령'을 공포하고 숭례문과 흥인지문을 포함하여 212점을 조선 보물로 지정했어요.
4. 1936년 '경성성곽'을 고적으로 추가 지정했는데, 조선신궁이 있는 남산 구간은 고적 지정에서 제외를 했어요. 그리고 지정한 구간에 대해서도 별다른 보호 조치를 하지 않았지요. 경성 성곽을 고적으로 지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산총독부는 혜화문 육축과 주변 성벽을 철거했지요.
1.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었어요. 해방이 되자 한반도에 살던 75만여 일본인들이 빠져나갔어요. 서울은 약 110만명 중 25명 정도가 일본인이었어요. 해방 된 이후 해외에 나가 살던 백성들이 돌아왔어요. 당시 해외에 살던 우리나라 사람은 약 300만명이었어요.
2. 1946년 말까지 일본에서 130만명, 중국에서 90만명, 남태평양 제도에서 3만 명이 돌아왔지요. 이 사람들은 배를 이용하여 수를 헤아릴 수 있지만, 만주에서 걸어 들어오는 사람들은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어요.
3. 시골에서 농사짓던 사람들, 장사하던 사람들 모두 서울로 몰려들었어요.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수십 만개의 좋은 일자리들은 야망에 불타는 사람들을 유혹했지요. 서울은 유혹의 도시였어요.
4. 1946년 초부터는 북한 지역에서 정치적 이류로 삼팔선을 넘어 월남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1947년 3월 기준으로 하루 평균 1500여명이나 되었지요. 그해 약 50만명이 월남한 것으로 나와요.
5. 이렇게 급격한 인구 증가로 인해 잘 곳을 찾아 이곳저곳 헤매거나 아무 곳에나 땅굴을 파고 들어가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었어요. 그로 인해 성벽도 더 망가졌지요.
6. 6.25 전쟁 중 한양도성은 더 집중적이고 대규모의 피해를 입었어요. 서울역 가까운 남산 일대 남아있던 성벽은 유엔군의 집중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고, 남대문도 크게 손상되었어요. 다른 구간의 성벽들도 서울 탈환 과정에서 피해가 많았어요.
7. 6.25 전쟁 이후, 서울 인구는 다시 급증했어요. 무작정 상경한 사람들 대부분은 청계천 주변이나 내사산 자락에 토막을 짓고 살기 시작했어요. 이들에게는 한양도성의 성돌은 문화재가 아니라 가져다 쓰기 편한 건축 자재였지요.
*경신중고등학교에서 혜화문 사이에 개인 주택의 담장이 성벽 위에 쌓아 졌어요.
* 돈의문 터와 인왕산 사이에 개인 주택의 담장이 성벽 위에 쌓아졌어요. 바로 주변에는 길게 빌라 담장으로 이용되고 있지요.
8. 1955년 경신고등학교는 학교 신축공사를 하면서 주변 성돌로 축대를 쌓았어요. 경신고등학교 축대는 한양도성 훼손의 대표적 사례이지요.
9. 1962년 1월, 대한민국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었어요. 일제 강점기에 보물, 고적, 명승 등으로 지정된 것들을 국보, 보물, 사적 등으로 다시 분류하고 소재지별로 관리번호를 붙였어요.
10. 한양도성의 남대문은 국보 1호, 동대문은 보물 1호로 지정되었고, 1963년 1월에 한양도성의 나머지 구간들이 사적 10호로 지정되었지요.
1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보존하는데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어요. 1963년 장충단에서 한남동을 거쳐 한강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확장하고, 옛 '남소문'이 있던 자리 주변에 자유센터와 타워호텔을 지었어요. 이 때 훼손된 성벽에 놓여있던 수많은 성돌이 자유센터 축대석으로 사용되었지요. 자유센터 축대 곳곳에 세종 대에 성을 고쳐 쌓으면서 새겨진 각자성석들이 남아 있어요.
12. 1975년 퇴계로를 확장하면서 광희문을 원래 위치에서 15미터 남쪽으로 옮겨 다시 세웠어요. 서울시는 1960년대 중반부터 누대만 남은 광희문을 철거할 계획을 세웠으나, 문화재를 보호해야 한다는 여론에 밀려 방치했었지요. 1974년 대통령 지시로 '서울 성곽 복원 사업'이 시작되면서 '복원'이라는 이름으로 원래 위치에서 철거되는 작업이 이뤄진 것이지요.
13. 1968년 1월 21일 북한군 특수부대가 청와대 인근의 백악까지 침투하는 사건이 발생했어요. 이 사건을 계기로 백악과 인왕산 일대 성벽 주변은 민간인 출입 금지 구역이 되었고, 성벽은 군사 시설이 되었어요. 성벽 주변에 군 초소 등이 신설되고 산 정상에 방공 시설 등이 설치되는 과정에서 도성은 다시금 훼손되게 되었어요.
광해군 때 숭례문 성벽에 불량배들이 붉은 글씨와 검은 글씨로 낙서한 일이 있었어요. 광해군은 숭례문 수문장에게 벌을 주었고, 마을 사람들에게 깨끗이 지우게 했어요. 이후 낙서를 하는 사람을 잡으면 현장에서 잡아 옥에 가두고 절대로 풀어주지 말라고 했지요.
순조 때에는 숭례문을 훼손한 사람을 사형시킨 일도 있었다고 해요.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 경, 방화범 채종기(70, 경북 칠곡)의 방화로 인한 화재가 발생하여 현장에 수십여대 소방차가 출동하여 진화작업을 펼쳤으나, 2월 11일 0시 40분 경에 건물 천장에서부터 화염이 일었고, 오전 1시쯤부터는 2층 누각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어요. 결국 화재 5시간 만인 오전 1시 54분 경, 불에 타지 않는 석축을 제외한 1, 2층 목조 누각이 대부분 전소하여 많은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모두 붕괴되었어요. (이 사건 이후 초기에는 왜 불을 일찍 끄지 못하였나가 주 초점이였지요. 하지만 이는 숭례문의 구조상의 문제로 판명되었어요. 지붕 밑에 있는 칸에 있던 불은 물이 닿게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초기 진압이 어려웠고, 결국 무참히 타버렸던 거예요.)
초기 수사당국에서는 누전이나 합선에 의한 화재인지, 고의적인 방화에 의한 화재인지 의견이 엇갈리다가 화재 발생 후에도 숭례문의 전등이 꺼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누전사고는 아닌 것으로 보고 방화 가능성에 무게를 두어 수사한 결과, 목격자의 진술을 토대로 이미 창경궁 문정전에 방화한 전과가 있는 방화범인 채종기를 검거하였어요.
하지만 600년 가까이 이어져오던 대한민국의 문화유산 중 하나가 이미 소실된 후였고, 이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크나큰 아픔으로 남게 되었어요. 이에 문화재청은 숭례문을 원형에 가깝게 복구할 계획을 밝히고 복구작업을 벌여 현재 복구되어 개방되었어요.
'보물 1호' 흥인지문 방화 4분 만에 진화...용의자 검거
- YTN, 2018.03.09. 뉴스
1, 조선시대 한양도성 1차, 2차 공사가 49일 짧은 기간에 마치게 되어 부실 공사가 이뤄지기도 하였어요. 이런 곳들에 대한 보수 공사가 계속 되었어요. 세종 때 도성을 보수공사를 하였는데, 도별로 구역을 나누어 공사를 했어요. 총 32만 3460명이나 참여했지요. 흙으로 된 것을 돌로 다시 쌓은 것이었는데, 공사 중 사망한 사람이 800명이 넘었다고 해요.
2. 적의 공격을 대비해 도성을 쌓았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홰군과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한양도성이 짓밟혔어요. 흥인문, 숭례문, 돈의문 3군데를 제외하고나머지 성문의 문루가 모두 없어졌어요. 이후 숙종과 영조 때 문루를 다시 세웠는데 북대문인 숙정문은 문루를 세우지 않다가 1970년대에 문루를 다시 세웠지요.
3. 해방 이후 한양도성의 복원 사업은 6.25 전쟁 중 폭격으로 손상된 숭례문을 수리하는 거였어요. 숭례문 문루를 복구하고, 단청을 새로 칠했어요. 주변 성벽은 보수할 여력이 없었지요.
4. 1961년 창의문 좌측 성벽 일부와 1972년 인왕산 북측 성벽의 석축 일부를 보수했는데, 보수한 구간보다 무허가 주택들의 담장으로 바뀐 구간이 더 많았어요.
5. 1975년 4월부터 '서울성곽복원사업추진본부'와 '서울성곽복원위원회'를 구성하여 성곽 복원 사업을 시작하였어요. 실측 조사 결과 도성 전체 길이가 1만 8127m였고, 6703m가 완전 멸실되었으며, 1만 1424m는 파손된 상태였어요. 이 중에서 10.88.km를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하기로 결정하고 8개 지구로 나누어 업체를 선정하여 공사를 맡겼어요. 그러나 예산과 시간 부족, 성돌 조달 문제, 성벽 주변 무허가 건축물 철거 문제 등으로 지연되면서 삼청지구 2570m만 완공되었고 1981년까지 총 연장 9764m가 복원되었어요.
6. 광희문은 1975년 퇴계로를 확장하면서 원래 위치에서 15m 남쪽으로 옮겨 다시 세웠어요.
7. 1994년 서울 정도 600년을 맞으면서 한양도성 복원 사업이 다시 시작되었어요. '남산 제 모습 찾기'로 1994년 남산 봉수대가 복원되고 외인아파트가 철거되었으며, 1996년 수방사가 이전하고 그 자리에 남산 한옥마을이 만들어졌어요.
8. 일제 강점기에 돈의문, 소의문, 혜화문이 철거되었는데, 혜화문은 1994년에 원래 자리를 떠나 북쪽 언덕으로 옮겨 다시 세워졌어요. 돈의문과 소의문은 아직도 사라진 상태로 있지요.
9. 1998년 낙산아파트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낙산공원이 조성되었어요.
10. 2020년 7월 '청계천 복원' 사업이 시작되었어요. 청계천 복원 사업과 함께 인왕산 인근 1500m, 혜화문 위쪽 945m, 광희문 구간 75m를 복원하였어요. 이때 오간수문은 복원하지 못하였어요.
11. 2005년 5월, 숭례문 주변 교통 체계를 개편하고 광장을 조성하여 시민에게 개방을 하였어요. 9월에는 1.21 사태 이후 민간인 통행 금지되었던 숙정문 주변 성곽길을 개방하는 것을 발표한 후 2006년 4월부터 개방을 하게 되었어요.
12. 2005년 12월부터 사직터널에서 돈의문에 이르는 한양도성 멸실 구간 약 700m를 복원하기로 하여 2011년 9월 완료되었어요. 그러나 문화유산 복원에 대한 원칙적인 고려가 부족하여 기계로 다듬어 규격화한 성돌을 사용함으로써 한양도성의 '완전성'과 '진정성'을 훼손하는 결과가 되었지요.
13. 2006년 11월, 숭례문 좌우 성벽 복원이 발표되었고, 2008년 2월 숭례문 방화 사건으로 2013년에야 복원되었어요.
14. 2009년 10월 21일, '서울성곽 중장기 종합 정비 기본 계획'에서 2013년까지 돈의문을 원 위치에 원형으로 복원하고 멸실된 성벽 인왕산 구간 83m, 남산 구간 753m, 옛 동대문운동장 주변 263m 등 총 7개 구간 2175m를 다시 쌓기로 했어요.
15. 현재에도 서울을 유네스코 '세계 역사도시'로 등재하겠다는 문화재청의 구상을 기본으로 하여, 서울시는 2012년 5월 7일 '한양도성 복원 관리 활용 계획에 관한 종합 계획'을 발표했어요. 한양도성도감과 한양도성 자문위원회를 조직하고 '한양도성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목표로 복원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지요. 또한 서울역사박물관 산하에 '한양도성연구소'가 신설되었어요. 한양도성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할 수 있도록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며 학술적 기초를 마련하기 위해서였지요.
복원 공사를 마친 숭례문에서 단청이 갈라지는 현상이 2013년 11월 발견되었다. 아교의 코팅 재료로 들기름과 합성수지를 쓰면 벗겨짐을 막을 수 있었지만, 전통 기법이 아니라는 이유로 유동나무 기름 (동유)를 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전통 건축에서 동유를 단청의 코팅으로 사용한 적은 없었으며 문화재청이 실험을 한 결과 안료가 갈라지거나 벗겨지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내용의 보고서도 썼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 이후 2013년 12월에는 숭례문 기둥에서 균열이 발견되었다. 나무를 잘 말려서 써야 하지만 급히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2014년 1월에는 숭례문에 사용한 소나무로 삼척에서 벌목된 금강송 대신 러시아산 소나무를 썼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금강송은 강원도와 경북 북부 일부에서 자라는 소나무(Pinus densiflora)로 독특한 기후 조건에 의해 강도가 높은 고급 소나무이다.
2014년 1월 3일, 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숭례문 복구와 앞선 광화문 복원 공사에서 나무를 공급한 신응수 대목장이 관급 목재 빼돌리고 값싼 러시아산 소나무로 바꿔치기했다는 의혹과 관련해, 법원의 수색영장을 발부받아, 신 대목장 서울 자택과 그의 아들이 운영하는 강릉 W 목재상, 광화문 안에 있는 신 대목장의 치목장(나무를 다듬는 곳) 등 5∼6곳을 압수수색했다.
문화재청은 연륜연대학 전문가 박원규 교수에게 나이테를 이용한 분석을 의뢰했고 국립산림과학원에는 유전자 검사를 의뢰했다. 숭례문에 사용된 소나무가 대한민국에서 자라는 소나무 종인 Pinus densiflora일 경우 삼척시 준경묘에서 베어낸 금강송이 맞는지 유전자 검사로 진위를 확인하기 어렵지만 러시아에서 주로 분포하는 소나무의 종인 구주소나무(구주적송,Pinus sylvestris)일 경우 유전자 검사를 통해 진위를 판명할 수 있다. 한편 나이테 분석을 통해서는 유전자 검사로 진위를 확인하기 어려운 상황인, 같은 소나무종 목재의 원산지가 한국이 맞는지도 분석할 수 있다.
박원규 교수는 1월 17일 나이테 분석을 통해 19개중 7개가 의심스럽다며 그중 2개는 가짜가 유력하고 5개는 판단이 불가능하다고 인터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