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 한양도성이 뭐예요?

    '한양도성'은 이성계(태조 임금)이 조선을 세우고 1396년에 도읍지(수도)를 한양으로 옮긴 후 궁궐과 도시를 지키기 위해 만든 전체 약 18.6km의 성, 도성이에요.

   조선시대 최고의 베스트셀러이자 최고의 풍수지리서인 ‘택리지’를 지은 청화산인 이중환은 한양도성을 보고 “온 나라 산수의 정기가 모인 곳”(一國山水聚會精神之處)이라고 평가했다고 해요.(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서울신문 2014. 6. 15.)

   아래 '조선 최대의 프로젝트 한양도성' 영상을 볼까요?

♣ 성을 왜 쌓았을까요?

   요즘은 울타리를 만들지 않는 집들도 많이 생겨나고 있지요. 그런데, 우리 주변의 집들을 살펴보면, 울타리가 많이 있어요. 이 울타리를 담장이라고도 해요. 집을 보호하기 위해 울타리, 담장을 쌓은 것이지요.
   이처럼 성을 보호하기 위해 성의 경계를 따라서 쌓은 울타리를 성곽이라고 하지요. ‘성벽’이라고도 하고요. 울타리 안쪽에 집이 있듯이 성곽 안쪽에 성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보통 성과 성곽을 통틀어서 ‘성’이라고 부르지요.
   집 안에 외부인이 쉽게 들어오지 못하도록 담장을 쌓았듯이 성곽을 쌓아 성 안에 외부인, 특히 적이 쉽게 쳐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 거예요.
   집 안과 집 밖을 구분하듯이 성곽 안을 ‘내성’, 성곽 바깥을 ‘외성’이라고 하고요.
   성곽을 쌓는 이유는 성을 보호하는 목적도 있지만, 경계를 표시해주는 역할도 해요.

   개인 집에 쌓은 담장을 ‘성’, ‘성곽’이라고는 하지 않죠? 대부분 왕이 사는 궁궐, 또는 마을 전체를 보호하고, 마을의 경계를 나타내기 위해 쌓은 것을 성이라 해요.
   해미읍성, 고창읍성, 낙안읍성, 양산읍성 등 우리나라에는 지방의 주요 지역에 관청이나 백성들이 모여 사는 마을을 둘러 쌓은 성을 말해요.
   도읍지(수도, 서울)를 둘러싼 성곽은 ‘도성’이라고 부르지요. 왕이 사는 궁궐이 안에 있어서 ‘왕성’이라고도 부르죠. 고구려의 국내성과 평양성, 백제의 공산성과 부소산성, 신라의 금성과 반월성, 조선시대 한양도성 등이 도성이지요.
   바다나 국경을 지키기 위해 쌓은 성이 있어요. 이를 ‘진성’, 또는 ‘진영’이라고 해요. 제주도 별방진성이 있어요.
   창고를 보호하기 위해 지은 성도 있는데, 이를 ‘창성’이라고 해요. 공세곶창성이 있고요.
   또 ‘장성’이라고 있어요. 국경을 따라서 길게 쌓은 성이지요. 중국의 만리장성, 고려의 천리장성이 있고요.
   ‘관문성’은 교통의 요지에 쌓은 성이지요. 위급할 때 교통로를 차단하기 위해서 쌓은 것으로, 문경새재가 관문성인 거죠.

   우리나라에는 산성이 참 많아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남한산성, 우리가 사는 곳으로부터 매우 가까이에 북한산성도 있지요. 산이 많고, 산을 잘 이용했기 때문이에요.
   평지에 있는 산성은 ‘평지성’, 산과 평지에 걸쳐 있는 성을 ‘평산성’이라고 부르지요.

   그러면 무엇으로 성을 쌓았을까요?
   처음에는 흙을 파서 도랑을 만들거나 흙으로 쌓았어요. 이를 ‘토성’이라고 하고 ‘몽촌토성’이 있지요. 이후 점차 성을 쌓은 기술이 발달하고 마을의 규모가 커지면서 나무, 돌, 벽돌로 쌓은 것도 생겼나게 되었답니다.

   에구구..., 성의 이름도 참 많군요.

♣ 이야기 속으로 – 한양은 어떤 곳일까?

   역사를 살펴보면 한양은 매우 오래된 곳이지요.
   한양 일대에서 선사 시대의 유물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기원전 4000년경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던 것으로 추측되지요. 한양은 한강이 흐르고 김포 평야가 맞닿아 있는 등 사람이 살기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고, 지리적으로도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해 교통의 중심지로 발달했어요. 그래서 삼국 시대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 등 모든 나라가 한양을 차지하기 위해 다투었던 곳이지요.

   한양을 가장 먼저 차지한 나라는 백제였어요. 백제는 한양을 도읍지 - ‘하남위례성’*으로 삼아 나라의 기틀을 세웠지만, 475년 고구려 장수왕에게 빼앗겼지요. 이후 백제는 잠시 동안 한양을 되찾았으나 다시 신라와의 전투에서 지고 말았어요. 신라는 한양 일대를 차지하면서* 중국과 교류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고, 나아가 삼국 통일의 기반을 만들게 되었지요.
  <  ☞ *신라가 한양 일대를 차지하고 나서 북한산에 비석을 세웁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선정한 우리 유물 100선 중 하나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국보 제3호입니다. 인터넷에서 더 찾아보고, 가족과 함께 북한산으로 진흥왕 순수비를 만나러 가볼까요? >
 
    삼국 시대에는 한양을 ‘위례성’ 또는 ‘남평양성’, ‘한성’이라고도 불렀어요. ‘한성(漢城)은 한강 유역에 도읍하고 있던 시기에 왕성을 포함하여 백제의 수도를 포괄하는 용어로도 사용되었다고도 해요. 이에 따라 백제가 처음 도읍하여 한강 유역을 빼앗기고 공주로 도읍을 옮기기 전까지의 시기를 한성 시대라고 불러요.
   < *하남위례성은 500여 년간 도읍으로 기능하였다고 하며 오늘날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 일대와 몽촌토성 및 풍납동토성 등으로 추정하고 있어요. >

    고려 시대의 한양은 비록 도읍지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중요한 도시였어오. 한양을 ‘양주’ 또는 ‘남경’으로 불렀는데, 문종 때인 1068년에는 풍수지리설의 영향으로 남경(南京)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해요. 고려의 사경(四京) 중 하나가 되었지요. 사경(四京)이란 ‘네 개의 서울’이라는 뜻으로 개경(개성 - 중경, 中京)과 평양(서경, 西京), 경주(동경, 東京), 한양(漢陽)* 을 말해요.
   < *한양(漢陽)은 한자말을 그대로 풀어보면 ‘햇볕이 잘 드는 따뜻한 동네’라고 할 수 있어요. >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태조)는 개경을 떠나 한양을 도읍지로 삼았어요. 그는 풍수지리에 밝은 무학 대사에게 새로운 나라에 걸맞은 수도를 찾도록 했는데, 처음에는 계룡산 등이 거론되었으나 1394년 한양으로 최종 결정했어요. 이듬해부터 본격적으로 궁궐과 성곽을 쌓는 공사가 시작되어 한양은 도읍지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지요. 한때 조선의 제2대 임금인 정종이 개경으로 수도를 옮기기도 했었으나 동생인 이방원(태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는 다시 한양으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어요.

   조선 시대 이후에는 ‘한양’이나 ‘한성’ 또는 ‘경성(京城)’으로 부르다, 지금은 ‘서울’이라고 부르지요.
   서울은 본래 ‘수도’*처럼 한 나라의 도읍지를 뜻하는 말이었으나 지금은 대한민국 수도의 정식 이름이 되었어요.
  < *수도(首都)는 나라의 우두머리가 되는 분이 살고 있는 도시라고 해도 될까요? >

   서울이라는 말은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를 서라벌(徐羅伐), 서벌(徐伐), 서나벌(徐那伐), 서야벌(徐耶伐) 등으로 부른 데서 비롯된 것으로 추측하기도 해요.
   백제 말기에는 수도인 부여를 소부리(所夫里)라고 불렀던 점에서 삼국시대에 수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였다고도 해요.
   서울의 ‘서’는 수리, 솔, 솟의 음과 통하는 말로 ‘높다’, ‘신령스럽다’는 뜻이 있으며, ‘울’은 벌, 부리에서 변음된 것으로 ‘벌판’, ‘큰 마을’, ‘큰 도시’라는 뜻을 가진 말이었다고도 해요.
   서울은 한자로 경(京)과 도(都)로 표시되는데, '경'은 '크다'는 뜻이고 도는 거느린다, 번성한다는 뜻이기도 해요.
 

♣ 이야기 속으로 - 고려의 이성계 장군, 조선의 왕이 되다.

   이성계는 최영과 함께 고려 북쪽의 홍건적*, 남쪽의 일본 해적을 물리친 고려의 장군이었어요.
  <  *홍건적은 원나라가 망하기 직전에 난을 일으킨 반란군으로, 머리에 붉은 수건을 둘렀다 하여 홍건적이라 했어요. >
   이성계 장군이 활약할 때, 원나라는 힘이 약해지고 명나라가 영토를 넓혀가며 중국의 새 주인이 되어가고 있었어요.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철령 이북 땅을 내놓으라고 고려를 압박했어요.
    “앞으로는 철령(현재 북한의 함경남도 안변 지방) 이북 지방이 명나라 땅임을 선포하노라. 고려는 철령 이북 땅 모두를 내놓으시오.”
    철령은 이전에 원나라의 쌍성총관부가 있던 지역이었지만, 철령은 고려 공민왕 때 원나라로부터 되찾은 땅이었지요.
   한편, 명나라는 고려가 원나라와 힘을 합칠까 의심을 하게 되었어요.
   “고려 우왕, 우리 명나라가 원나라를 치는데 필요한 물자를 제공하시오.”
   고려의 우왕은 참을 수가 없었어요.
   “최영, 이성계, 장군, 명나라가 철령 이북 땅이 자기네 땅이라고 내놓으라고 하고, 원나라를 치는데 물자를 제공하라니, 이게 웬말인가? 요동을 정벌하시오.”
    그런데 요동 정벌에 대해 고려의 장군들은 서로 반대 입장이었어요. 최영 장군은 요동 정벌을 기회로 명의 기세를 꺾자고 했지만 이성계는 네 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했어요.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은 이롭지 못합니다. 둘째, 지금은 일손이 바쁜 농사철이옵니다. 장정들을 싸움터에 끌어내면 농사를 지을 수 없사옵니다.셋째, 요동을 치기 위해 남쪽을 비우면 왜구의 침략을 받사옵니다. 넷째, 우리의 주 무기는 활입니다. 장마철인 지금은 활에 먹인 아교가 풀려서 활을 사용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군사들이 전염병에 걸릴 위험이 많습니다. 이러하기에 요동 정벌은 성공할 수 없으니 명나라를 치면 안됩니다.”
   그러나, 고려의 우왕과 최영 장군은 요동을 정벌을 강행했어요. 그리하여 우왕과 최영 장군은 평양으로, 이성계 장군은 압록강으로 향했습니다.
   “이성계 장군, 압록강으로 하루라도 빨리 가주시오.”
   이성계는 일반적으로 걸리는 시간보다 더 느리게 가서 위화도*에 도착하는데 무려 19일이나 걸렸어요. 더구나 이성계가 이끄는 군대는 압록강을 건널 생각도 없었고, 14일 동안이나 그저 지켜만 보고 있었어요. 비가 억수같이 퍼붓고 강물이 넘쳐흘러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지요.
< *위화도는 압록강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어 명나라의 영토가 아니었지요. 위화도에서 압록강을 건너면 바로 ‘요동’ 땅입니다. 지금의 중국의 요녕성(랴오닝성)입니다. >
   이성계는 평양에 있는 우왕과 최영에게 군대를 돌리게 해달라고 급히 편지를 썼어요.
   “군사들이 굶어 죽고, 장마철에 불어난 물이 너무 깊어 건너기 곤란하오니 부디 군대를 돌리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고려 우왕과 최영 장군은 요동을 정벌하기를 재촉하였습니다.
   “이성계 장군, 빨리 강을 건너 요동 정벌에 나서시오.”
   생각이 달랐던 이성계는 군사들을 설득하기 시작했어요.
 "우왕과 최영 장군이 빨리 요동을 치라고 명령하고 있지만, 현재 상황에서 요동 정벌은 불가능하오."
   “장군님, 계속 싸우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죽으라는 소리와 같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지금 요동을 치면 안 되고, 돌아가야 한다는 장군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결국 이성계 장군은 위화도에서 요동을 치지 않고 군대를 돌렸습니다.*
  < *이 사건을 위화도에서 군사들을 돌렸다하여 ‘위화도 회군’이라고 부릅니다. >
   이성계 장군이 왕의 명령도 따르지 않고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은 우왕과 최영은 부랴부랴 평양에서 개경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최영 장군은 고려 왕실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이성계 장군을 막기 위해 군사들을 모아 맞섰지요.
   그렇지만 요동을 정벌하라고 이성계 장군에게 많은 군대를 내주었던 최영 장군은 결국 졌고, 이성계 장군이 왕이 되었어요.

☞ 요동 정벌에 대한 찬반 의견이 팽팽했었어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이성계 장군의 위화도 회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이야기 속으로
  - 이방원의 '하여가'와 정몽주의 '단심가' 

   <앞의 이야기에 이어서...>
   싸움에서 이긴 이성계 장군은 고려의 우왕을 강화도로 내쫓고, 최영 장군을 유배를 보냈어요.

   “고려의 왕씨 왕조를 그대로 두고서는 나라를 바꿀 수 없습니다.”
   하루 빨리 나라를 변화시키고 싶어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중심 인물인 이방원이 말했어요.
   “하지만 정몽주 등이 고려를 그대로 두고 그 안에서 나라의 틀을 바꾸자고 하질 않느냐?”
   위화도 회군 뒤 실제 권력을 움켜쥐게 된 이성계가 조심스러워하는 것을 안 아들 이방원은 강한 의지를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나라를 바꾸는 것에 함께 할 수 없다면 싸워서 이기는 수밖에 없으니, 그들은 저 이방원에게 맡겨 주십시오.”

  그리하여 이방원은 정몽주에게 시조를 한 수 건넵니다. 이방원이 정몽주를 설득하기 위해 지은  ‘하여가’라 하는 시조이지요.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정몽주는 이에 대한 대답으로 자신의 마음을 읊은 시조 ‘단심가’를 보내지요.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방원은 자신이 설득하고자 했던 정몽주가 변하지 않자 선죽교에서 죽이고, 반대 세력을 무너뜨립니다.

   그 후 이성계는 귀양 갔던 조준, 정도전 등을 불러들여 조정의 높은 자리에 앉혔어요. 이렇게 되니 고려의 힘 없는 공양왕은 이성계의 세력을 막을 수 없음을 알고 한탄을 하게 되었지요.
“누구도 이성계에 맞설 수가 없다니...”
얼마 뒤, 공양왕은 폐위되어 원주로 귀양을 떠나야 했어요.

  이성계 장군은 위화도 회군 후 약 4년 동안, 토지와 조세 제도 개혁 등을 실시하며 백성들의 존경을 받게 되었고, 정몽주와 같은 온건파의 반대 속에서도 정도전의 지지를 받아 결국 1392년 고려의 옛 수도이던 개성의 수창궁에서 조선의 제1대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던 거지요.

☞ 이방원과 정몽주의 두 시조(하여가와 단심가)를 읽고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합니까? 두 사람의 삶을 비교해 볼 때,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살 것 같은지요?

♣ 이야기 속으로 - 꿈에 얽힌 이성계 이야기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 낮잠을 자는데 자신이 서까래 세 개를 등에 지고 ‘꼬끼오’하고 우는 꿈을 꾸었어요. 그래서 무학대사를 찾아가 해몽을 부탁했지요.
   그랬더니 무학대사는 꿈 해몽을 해주었어요.
   “이 꿈에서 서까래 세 개는 ‘임금 왕(王)’자를 의미하고, 꼬끼오는 한자로 ‘고귀위(高貴位)’, 즉 가장 높고 귀한 자라는 뜻입니다. 장차 왕이 되실 꿈을 꾼 것입니다.”
   무학대사의 꿈 해몽처럼 이성계는 정말로 조선의 왕이 되었네요.

☞ 우리의 일상 생활 속에서 꿈을 꾸고 난 다음, 여러분이 꾸었던 꿈대로 이뤄어졌나요?

♣ 서울 한양도성의 정식 이름은?

   '서울 한양도성'이 정식 이름입니다.
   2011년 7월 역사 유적의 통일된 이름을 지정하는 사업으로 변경되었는데, 그 이전의 공식 이름은 '서울 성곽'이라는 이었어요. 지금도 통일된 이름으로 부르고 있지는 않지만, 정식 이름인 "서울 한양도성"으로 불러야겠어요.

   서울 한양도성은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어 있지요.

♣  서울 한양도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되기를 꿈꾸며...

   서울 한양도성은 2012년 11월 23일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 목록에 등재되었어요. 세계문화유산 잠정 목록에 오르면 1년 뒤부터 등재 신청 자격이 주어지지요. 하지만 2017년 3월 21일, 이코모스(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국제적인 문화재를 보호ㆍ보존하기 위해 세워져 세계유산위원회와 유네스코의 자문기관)로부터 다른 나라의 세계유산 도시 성벽과 비교해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충족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아 등재 불가로 결정되었어요.

   그러나 2022년에 한양도성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목표로 자료를 보완하여 다시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곳에서는 서울 한양도성이 세계문화유산이 꼭 되도록 꿈꾸며 공부하고자 하는 거예요.
  꿈꾸는 자, 노력하는 자, 꿈을 이룰 것이기 때문이지요.

♣ 한양도성의 꿈 - 노래 배워 부르기

<가사>
                     한양도성의 꿈

아주 오랜 옛날 그 곳 도시를 둘러싼 멋진 
육백년을 넘어 항상 친구가 되어준 돌담
바윗돌 다듬어 심고 땀 흘려 쌓았던 손길
이 땅의 심장을 품고 서울을 안았던 도성

꿈 굽이치는 능선 따라 울창한 산길을 올라
꿈 속삭이는 냇물 따라 아낙네 빨래터를 지나
아주 오랫동안 여기 너와 내 곁에서 함께
이 터를 지켜온 착한 돌담의 얘기를 들어

언젠가 힘이 들어 쓰러지고 굳건한 성벽이 헐려
끊어진 마디마디 사이 서로가 그리워질 때면
다시 일어서리 함께 쌓아서 이으리 
성돌에 새겼던 다짐도성이 꾸었던 꿈을 
동서남북으로 향한 사대문 젖히고 활짝
도성이 꾸었던 꿈을 세계와 노래해 함께

하나로 이어진 도성의 꿈을 
모두가 듣게 해 그 꿈의 함성
천년을 향하여 달리자 함께
인류의 유산이 되어줄 그 꿈 그 꿈 그 꿈
천년의 꿈 도성의 꿈

*악보 출처: https://seoulcitywall.seoul.go.kr/board/B0007.do?act=read&bpoId=776&bcaId=0&pageIndex=10

♣  한양도성은 어떤 가치가 있을까요?

   ☞  한양도성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

1) 서울 한양도성은 오백여 년 동안 조선왕조의 도읍으로 궁궐, 관청, 종묘·사직과 도성 백성의 보호막으로 나라의 중심이자 도읍의 상징이에요.
2) 한양도성은 고구려 평양성과 고려 개성의 평지성과 산성을 융합한 독창적 한국형 도성 제도를 계승한 동아시아 유교 질서와 상징 체계를 반영한 도성이에요.
3) 1396년 전국 수십만 명을동원하여 건설된 한양도성은 세종, 숙종 연간에 개축하여 오늘에 이르며 그 축성과정이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의역사서에 기록되어 있으며 성벽에는 시기별 축조기술의 변화가 고스란히 담겨있어요.
4) 내사산의 능선과 평지를 아우르는한양도성은 풍수지리 사상을 반영하여 지형과 조화롭게 건설되었으며, 도성 사람들의 놀이 장소이자 문학·회화·민속의 배경이 되어 왔어요.
5) 오늘날 한양도성은 천만 도시 서울이 품은 역사유적으로 자연 속의 도시경관과 도시 속의 역사경관이 조화를이루며 600여 년 역사를 지켜오고 있어요.
6) 전체 길이가 18.627km로 현존하는 세계 수도의 성곽유산 중 가장 큰 규모로 현재 12.854km의구간이 원형 또는 복원된 상태로 보존되어 있으며, 나머지 구간 가운데 일부는 지하유적으로 남아있어요
7) 석재로 축적된 성곽 안쪽에 판축층을 조성하는 등 지형과 일체화된 축조기술을 보여주고 있고, 성곽은자연적인 지형을 활용하여 축조되었기 때문에 내사산의 굴곡과 도성의 안팎이 함께 조망되는 뛰어난 도시경관을 보여주고있어요.
8) 집단 장인기술로 구축된 유산 한양도성은 전국 각지의 백성들이 성곽을 축조했는데, 구간마다 축조에 참여한 장인들의 실명이 새겨져 있어요.
9) 서울 한양도성의 보존을 위해 내사산의 지형을 잘 보존하여 왔고, 도성 안의 하천을 유지하기 위해 내사산의 수종들을 잘 관리하여 왔어요.
10) 조선왕조 500년 동안 한양도성의 문루와 성곽을 주제로 한 문학작품과 도성 풍경을 묘사한 회화 작품이 많이 남아 있어요.
11) 한양도성은 한양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삶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면서, 서울 사람들의 삶의 공간 중하나로서 기능하였고, 신앙, 의례, 문예, 놀이의 장소였어요.

   ☞  한양도성의 진정성

서울 한양도성은 조선왕조 오백여 년 동안 수축과 수리의 과정을 통해 지속해서 관리되어왔다. 그 과정을 통하여 시기별로구별되는 재료와 축조기술이 성곽의 형태와 디자인으로 드러나 있어서 오백 년의 역사적 층위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지형과 일체화된 구조물로서의 존재 방식을 유지하고 있어서, 내사산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성곽유산으로서의 진정성을 확인할수 있다.
2008년 서울 한양도성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숭례문이 방화로 부분 소실되었는데, 기존의실측기록을 토대로 장인기술에 의하여 전통기법으로 복원되었다. 흥인지문과 더불어 도성의 성문 건축물의 원형과 진정성을확인할 수 있다.
문화재로 지정되어있는 서울 한양도성은 내사산의 지세와 함께 잘 보존되어있어서, 성곽의 입지 및 제도, 성곽축성기술, 성곽시설 등이 잘 보존되고 있다. 현대 서울의 도심에 위치하고 있으면도 도성경계로서의 역사적 가치와 장소적 의미가 잘 보존되고 있다.

   ☞  한양도성의 완전성

1) 서울 한양도성은 한국의 독창적인 도성 형식으로 조성되었으며 규모에서도 한국에서 가장 큰 성곽으로 전체 구간 중 약 70% 정도가 성곽의 원형 또는 유적 형태로 보존 관리되고 있어요.
2) 성벽과 더불어 성문·암문·수문·봉수대 등의 서울한양도성을 구성하는 성곽 시설들을 확인할 수 있어요.
3) 서울 한양도성의 내부에는 도성을 구성하는 궁궐과 종묘·사직단등의 주요 건축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어요.
4) 현재 한양도성은 국보와 보물, 그리고 사적으로 지정되어 국가문화재로서 관리되고 있으며, 철저한 고증을 거쳐 성곽의 잔존 및 훼손 구간에 대한 지속적인 복원 노력이 진행되어 왔어요. 서울시는 한양도성 종합보존·관리 및 활용 계획을 수립하고 한양도성을 세계유산의 관리 지침에 부합하는 기준으로보호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