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산구간

♣ 동영상을 보고 구간의 순성 계획을 세워봅시다.

   동영상을 따라 이동해 보아도 좋아요. 약 1시간 코스를 6분 영상으로 만들어서 매우 빠르니 중간 중간에 일시 정지를 누르면서 따라가 보세요. 중요 부분에 도착하면 자막으로도 표시를 해주고 영상으로 한 바퀴 집중하여 돌아봐줘요.

♣ 낙산구간 (간단 설명)

☞ 낙산 구간: 혜화문~흥인지문, 2.1km
   * 혜화문-한성대입구역 4번출구- 나무계단-가톨릭대학 뒷길-장수마을-낙산공원 놀이마당-낙산정상-이화마을-한양도성박물관(서울디자인지원센터) -흥인지문공원-흥인지문
☞ 소요 시간: 약 1시간
☞ 난이도: ★★☆☆☆
☞ 개방 시간: 24시간

♣ 가톨릭대학교 뒷길

   도성을 따라 걷는 길은 대부분 성 안쪽에 조성되어 있어서 주로 어깨 높이 정도의 여장만 보여요. 그러나 낙산 구간은 전 구간이 성 바깥에서 걸을 수 있게 조성되어 있어요. 물론, 암문을 통해 성 안쪽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요.
    특히, 가톨릭대학교를 따라 이어진 성벽길을 걸으면 한양도성의 웅장함과 견고함을 한눈에 볼 수 있어요. 또한 세종 · 숙종 · 순조 연간의 축성 모습을 비교해 볼 수도 있어요. 위의 사진처럼 매우 아름다운 성벽길 중 하나에요.

♣ 장수마을

   낙산공원 동남쪽 성벽을 끼고 있는 작은 마을로 한국전쟁 후에 형성된 판자촌에서 시작해요. 60세 이상의 노인 거주 인구가 많아 장수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었어요.
   뉴타운 예정지였으나 주민투표로 뉴타운 재개발을 중단하고 마을재생 사업을 벌이기로 결정하였어요. 그 후 주민들이 직접 집을 단장하고 골목길을 정비하여 지금처럼 산뜻하고 깔끔한 모습으로 변모하였어요. 주민 참여형 마을재생사업의 성공적인 사례로 꼽히지요.

♣ 낙산공원

   낙산(駱山, 해발 97m)은 남산, 인왕산, 북악산과 함께 서울을 둘러싼 능선을 형성하고 있는 내사산으로 한양도성이 이어지고 있지요. 북악산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산이에요.
   낙산은 산 전체가 노출된 화강암(花崗岩)으로 이루어져 있고 산 모양이 낙타(駱駝)의 등과 같다고 하여 낙타산(駱駝山), 타락산(駝駱山) 또는 낙산이라 불리게 되었어요.
   『신증동국여지승람』 한성부에 "도성 안 동쪽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요.
   『조선왕조실록』에 "타락산이 궐내(闕內)를 굽어 눌러 있으니, 그 밑에 목책을 설치하여 올라가서 바라보지 못하게 하라." 등 조선 연산군 연간에 성내를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낙산의 인가를 철거하게 하였다는 내용이 수 차례 나와요.
  낙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한 지맥이 뻗어 나온 산봉이 있는데 이를 동망봉(東望峯)이라 불러요.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내어주고 영월로 귀양가 있을 때, 단종왕비 송씨가 청룡사에 살면서 매일 이 산봉우리에 올라가 동쪽의 단종이 있던 영월을 바라보았다 하여 봉우리 이름을 동망봉이라 하였다고 해요.
   『여지비고』에서 "연미정동(燕尾亭洞)에 있는데 영조 47년에 어필로 글씨를 써서 비를 세웠다."고 전하고요.

   조선시대에는 낙산 아래에 수없이 많은 명사들이 살았다고 해요. 『동국여지비고』 ‘제택(第宅)’조에 “신광한의 집이 낙산 아래에 있는데, 사람들이 신대라고 하여 명승지로 꼽았어요. 낙산에는 낙산의 유방이라고 불렸던 약수터 2곳이 있었는데 각 이화동약수, 신대약수로 불렸어요. 신대약수에는 표암 강세황이 ‘홍천취벽(紅泉翠碧)’이라고 네 글자를 써서 바위에 새겨놓았다”라고 하는데, 지금은 사라졌어요.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은 좌의정을 지냈던 박은, 한성부판사를 지낸 이석형, 태종의 외손이었던 남이 그리고 좌찬성을 지낸 신광한과 동서분당의 주역인 김효원 등이 낙산 기슭에서 살았고, 우암 송시열도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았어요.
   인평대군이 거처했던 석양루(夕陽樓)가 있었고, 그 외 이화정(梨花亭), 일옹정(一翁亭), 백림정(柏林亭) 등의 정자가 있었어요. 단종이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에 의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를 떠날 때 단종비 정순왕후(定順王后)는 단종과 이별하고 이곳 낙산에 은거하며 살았다고 전해지지요. 정순왕후는 폐서인되어 낙산 아래 청룡사의 승려가 되었고 창신동 골짜기에서 비단에 자색 물을 들여 시장에 내다팔며 살았다고 전해져요. 명사들이 이렇게 대를 이어 살았던 것은 이 지역의 풍광이 그만큼 빼어났기 때문이겠지요.
   이곳에는 고종 때인 1868년에 건립되었으며 조선의 군무를 총괄하던 삼군부(三軍府)의 총무당이 있었는데, 1880년에는 통리기무아문의 청사로 사용되었어요.

   일제강점기에는 경성제국대학이 낙산 아래 위치했고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萬)의 집인 이화장(梨花莊)이 지금도 남아있어요. 

   사찰로는 고려시대 도선국사가 창건한 청룡사(靑龍寺)가 있고, 고려시대 혜거국사가 창건한 미타사(彌陀寺)가 있어요. 미타사는 여승들이 생활하는 곳이에요. 그리고 고려시대 담진국사에 의해 창건된 보문사(普門寺)가 있어요.

   낙산의 정상에는 낙산공원이 만들어져 있어요.
   장수마을에서 암문을 통해 도성 안으로 들어가면 낙산공원 놀이광장이 나타나요. 낙산공원은 서울의 몽마르뜨 언덕이라 불릴 정도로 전망이 좋은 곳이에요. 이곳에서 바라보는 노을과 야경은 특히 아름답다고 해요. 백악과 인왕산에서 서울의 원경이 보인다면, 이곳에서는 손에 잡힐 듯 가까운 도심을 느낄 수 있어요.

♣ 삼군부 총무당

   삼군부 총무당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조선의 군무를 총괄하던 삼군부 청사의 중심이 되는 본전으로 원래는 광화문 남쪽 정부종합청사 자리에 있던 것을 1930년대에 지금의 위치로 옮긴 것이에요.
   이 건물은 조선 고종 5년(1868)에 건축된 것으로 양옆의 덕의당, 청헌당이 있었으나 이곳에 총무당만 옮겼어요. 정면 7칸, 측면 4칸의 2고주 7량 합각지붕이고요. 조선시대 관아건물로서 보존된 희귀한 문화재이어요. 

♣ 이화마을

   이화마을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이화동에 위치한 벽화마을이에요. 대학로 동쪽, 낙산공원 바로 아래에 위치하고 있지요.

   이화동은 조선 시대 쌍계동(雙溪洞)이라 불렸으며, 양반들이 풍류를 즐기던 도성 내 5대 명소 중 한 곳으로 꼽혔어요.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을 위한 고급 주택단지가 조성되었고, 해방 이후 이승만 정부 시기에는 이화장 일대의 불량주택 개선을 목적으로 국민주택이 조성되었지요.
   그러나 이곳 이화동은 주택이 노후된 채로 2000년대까지 아무런 변화 없이 있었고, 마을에 살던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었어요. 2006년 문화체육관광부는 노후되어 방치된 지역의 여건 개선을 위하여 복권기금을 이용한 도시예술 캠페인을 진행하였어요. 이 캠페인에서 총 열한 곳의 지역이 선정되었으며, 민간단체인 공공미술추진위원회에서 이를 주관하였지요. 2006년 9월부터 12월까지 약 3억 5천만 원의 예산으로 이화동과 동숭동 일대에 주민과 예술인, 대학생과 자원봉사자의 참여로 벽화가 그려졌어요. 그리하여 이화마을 곳곳에 그림과 조형물이 탄생하게 되었어요.
   이 프로젝트의 결과로 이화 벽화마을은 건물과 주변 환경, 예를 들어 화분, 전봇대, 돌담, 계단 심지어 벽의 균열까지 예술의 일부가 되었어요. 나중에는 다른 방문 예술가들이 방문하여 전국적으로 비슷한 프로젝트를 실행하게 되었어요. 이화 벽화마을은 TV프로그램이나 각종 드라마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하면서 관광객들의 명소가 되었어요.

♣ 한양도성박물관(서울디자인지원센터)

   동대문성곽공원에 위치한 한양도성박물관은 조선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양도성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박물관으 로 상설전시실, 기획전시실, 도성정보센터와 학습실을 갖춘 문화공간입니다. 한양도성박물관에서 600년 한양도성의 역사 와 문화유산으로서의 미래가치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창신동 봉제마을 (채석장 터)

   낙산 성벽 바깥쪽 창신동 일대는 조선시대에 퇴직한 궁녀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에요. 1960년대 이후에는 동대문 시장에 의류를 납품하는 하청업체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한국 봉제 산업의 중심지가 되었어요.
   이 동네에 높이 40m, 길이 201m의 깎아지른 듯한 돌산 절벽이 있는데 대한제국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채석장으로 쓰였어요. 덕수궁 석조전을 비롯하여 일제강점기 서울에 지어진 석조건물의 상당수가 창신동 채석장에서 캔 돌을 사용하였어요. 지금은 채석장 아래에서 절벽 위까지 집들이 빼곡히 들어서 진풍경을 이루고 있어요.

♣ 흥인지문

   흥인지문(興仁之門)은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의 4대문(大門) 중의 하나로 동쪽의 대문이죠. 흔히 동대문(東大門)이라고도 부르는데, 조선 초기부터 불린 이름이에요.

   서울 4대문 및 보신각(普信閣)의 이름은 오행사상을 따라 지어졌어요. 이런 명칭은 인(仁: 동), 의(義: 서), 례(禮: 남), 지(智: 북), 신(信: 중앙)의 5덕(五德)을 표현한 것이었으며, 흥인지문(興仁之門)의 '인(仁)'은 여기서 유래한 것으로, 유교 덕목 중 어진 마음(인자함, 사랑)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인(仁)’을 넣어 이름을 붙였어요.

   처음에는 흥인문이었는데, 고종 때 한양의 동쪽이 약하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산맥을 뜻하는 한자인 지(之)를 넣어 약한 기운을 북돋으려고 하였어요.
   한편, 약한 터의 지세를 보강해 주고, 성문에 접근하는 적을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기 위해 다른 문과 다르게 문 앞에 옹성을 쌓았어요.

   화강석으로 된 홍예문의 축석 위에 지어졌으며, 도성의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을 갖추고 있어요.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모양을 한 우진각 지붕이죠.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그 형태가 가늘고 약하며 지나치게 장식한 부분이 많아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 있어요.
   또한 바깥쪽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반원 모양의 옹성(甕城)을 쌓았는데, 이는 적을 공격하기에 합리적으로 계획된 시설이라 할 수 있어요.
   숭례문이 조선 초기 양식으로 지어졌으나 흥인지문은 조선 후기 양식으로 되어 있어 서로 대비 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