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 축조 과정 영상 자료 편집
출처: 한양도성박물관
출처: 한양도성박물관
숭례문(崇禮門)은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의 4대문(大門) 중의 하나로 남쪽의 대문이죠. 흔히 남대문(南大門)이라고도 부르는데, 조선 초기부터 불린 이름이에요.
서울 4대문 및 보신각(普信閣)의 이름은 오행사상을 따라 지어졌어요. 이런 명칭은 인(仁: 동), 의(義: 서), 례(禮: 남), 지(智: 북), 신(信: 중앙)의 5덕(五德)을 표현한 것이었으며, 숭례문의 '례'는 여기서 유래한 것으로, 유교 덕목 중 예의를 소중히 여긴다는 ‘예(禮)’를 넣어 이름을 붙였어요.
숭례문은 도성의 정문의 역할을 했어요. 외국의 사신이 오면 이곳에서 예의를 다해 맞았고, 나라의 큰 행사를 할 때 의장 행렬이 이 문을 통해 갔으며 전쟁터에 나가는 군사를 배웅하기도 하였고 중국으로 가는 사신을 배웅하기도 했지요. 왕의 장례 행렬도 숭례문을 통해 나갔어요.
숭례문의 편액은 《지봉유설》 기록에는 양녕대군이 썼다고 알려져 있으나 여러 가지 의견들이 있어요.
<중요 역사 요약>
1396년(태조 5년) : 준공, 태종의 맏아들이던 양녕대군이 숭례문 현액을 씀
1398년(태조7년) : 숭례문 완성
1433년 7월 : 숭례문을 완전히 헐고 땅을 돋운 뒤 새로 짓기로 정함
1447년 8월경 : 숭례문 신축 착공
1448년 3월 17일 : 숭례문 신축 완공
1478년(성종 9년) : 숭례문이 기울어짐. 그 시기의 적절성으로 수리를 미룸
1479년 4월 2일 : 숭례문 중수 완공
1907년 : 요시히토 일본 황태자가 방한하자 일본 제국은 "대일본 제국의 황태자가 머리를 숙이고 문루 밑을 지나갈 수 없다"는 이유로 숭례문과 연결된 성곽을 헐어버렸음. 성곽을 헌 자리에 도로와 전차길을 내고, 숭례문 둘레에 화강암으로 일본식 석축을 쌓았고, 문앞에는 파출소와 가로등을 설치했음. 또한 이때부터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음.
1908년 9월 : 숭례문과 소의문 부근 성벽 총 77간이 훼철됨
1934년 :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보물 1호로 숭례문을, 보물 2호로 흥인지문을, 보물 3호에 원각사지십층석탑을, 보물 4호로 보신각종을 지정함.
1961년 : 한국전쟁 때의 파손을 복구하기 위해 전면 해체 중수작업에 착수.
1962년 12월 20일 : 조선총독부의 문화재 지정을 참고하여 남대문을 국보 제1호로 재지정.
1994년 11월 : 미술전문지 「가나아트」 40호가 미술인 70명에게 여론조사한 결과 서울의 랜드마크로 국보 1호 남대문이 33표로 1위로 선정됨.
2002년 2월 : 문화재위원회는 서울시의 숭례문 근접 관광 계획을 불허함. 불허 이유는 차량으로 인해 관람객이 위험에 처할 수 있고 복잡한 도로사정으로 숭례문을 차분하게 감상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함.
2003년 : 일제가 1907년에 헐어버린 성곽을 숭례문 좌우로 10m씩 복원.
2005년 5월 27일 : 1907년 일제에 의해 도로 속에 고립되었던 숭례문 주변에 광장을 조성·단장함.
2006년 3월 3일 : 중앙통로를 시민들에게 개방, 일반인 출입이 가능하게 됨.
2008년 2월 10일 : 숭례문에 방화로 인한 화재 발생.
2008년 2월 11일 : 석축과 1층 일부 만을 남겨놓고 2층 문루의 90%와 1층 문루의 10%가 타 버림
2010년 2월 10일 : 숭례문 복구공사 착공
2013년 4월 29일 : 숭례문 복구공사 완공
2013년 5월 1일 : 숭례문 관리단체를 종전 중구청에서 문화재청으로 변경
2013년 5월 4일 : 숭례문 공식 개방
<건축물 특징>
중앙에 홍예문이 있는 기반 위에 지어진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건물이에요. 홍예문에는 철이 덧씌워진 큰 문이 양쪽으로 달려 있지요. 기단 위로는 얕은 담을 두르고, 좌우 양쪽에는 작은 문과 계단이 있어 드나들 수 있게 하였어요. 전형적인 다포형식의 건물이라고 해요.
1. 숭례문의 현판을 누가 썼을까요?
이수광의 《지봉유설》과 《신증동국여지승람》,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양녕은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뛰어났으나 글을 알지 못하는 척했다. 스스로 미친 척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지만 아무도 양녕의 진심을 아는 이가 없었다."라고 전하듯이 양녕대군이 썼다고 되어 있지만, 다른 이야기들이 있어요.
추사 김정희의 《완당 전집》에는 조선 초기의 문신인 신장의 글씨라고 적혀 있으며,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숭례문이라는 이름은 삼봉 정도전이 지은 것이요, 그 액자는 세상에서 전하기를 양녕대군의 글씨라 한다”면서도 “숭례문의 편액은 정난종이 쓴 것”이라고 썼어요.
일제 강점기 때 잡지인 《별건곤》 1929년 9월호에는 “안평대군의 글씨는 오해요, 중종시대 명필 유진동의 글씨”라고 남겨져 있어요.
도대체 숭례문의 현판은 누가 썼을까요?
2. 서울 한양도성 성문의 현판이 대부분 가로로 달려 있는데, 숭례문의 현판은 왜 세로로 달았을까요?
서울 한양도성 다른 문과 일반적인 문들의 현판들은 대부분 가로로 달려 있지만, 숭례문의 현판은 특이하게 세로로 만들어져 있어요. 이는 관악산의 강한 불 기운을 눌러 한양도성을 화재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세로로 달았다고 전해지고 있어요.
* 현판(懸板)이나 편액(扁額)은 글씨나 그림을 새겨서 문 위나 건물 벽에 걸어 놓는 널빤지에요. 주로 건물의 이름을 써 놓아요.
1996년 11월, 국보 1호 변경 주장이 이슈가 되어, 문화재관리국이 서울시민을 대상으로, 서울대가 자체학생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하였어요. 서울시민 1,000명 중 67.6%가 변경에 반대했어요. 문화재전문가 144명 (문화재위원 49명, 전문위원 95명)의 59.2%가 변경에 반대했고요. 반면, 서울대 학부 및 대학원생 262명 중 57%(150명)가 변경에 찬성했어요. 변경 찬성 대답자들은 훈민정음을 1위로 지지했어요.
2005년 11월, 감사원은 국보 1호를 변경할 것을 문화재청에 권고했으며,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국보 1호 변경에 찬성했어요.
흥인지문과 숭례문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통과하여 철수한 문으로 지적되어 일제강점기 때 보존되었다는 주장이 있어요. 1934년 조선총독부는 보물 1호에 남대문을, 보물 2호에 동대문을 각각 지정하였지요. 해방 이후에도 남대문과 동대문은 각각 국보 1호와 보물 1호로 지정되었어요.
1. 변경 반대론
국보 제1호의 번호는 문화재의 가치순서가 아닌 단순한 관리번호이다. 문화재의 가치에 우열을 매긴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교체 시에는 국내외의 각종 문헌 자료를 수정해야 하는 등 혼란을 초래한다.
2. 변경 찬성론
남대문은 국보로서 대표성이 없다. 역사적 예술적 가치가 부족하다. 일본제국이 일방적으로 지정했기 때문이다.
☞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흥인지문(興仁之門)은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의 4대문(大門) 중의 하나로 동쪽의 대문이죠. 흔히 동대문(東大門)이라고도 부르는데, 조선 초기부터 불린 이름이에요.
서울 4대문 및 보신각(普信閣)의 이름은 오행사상을 따라 지어졌어요. 이런 명칭은 인(仁: 동), 의(義: 서), 례(禮: 남), 지(智: 북), 신(信: 중앙)의 5덕(五德)을 표현한 것이었으며, 흥인지문(興仁之門)의 '인(仁)'은 여기서 유래한 것으로, 유교 덕목 중 어진 마음(인자함, 사랑)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인(仁)’을 넣어 이름을 붙였어요.
처음에는 흥인문이었는데, 고종 때 한양의 동쪽이 약하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산맥을 뜻하는 한자인 지(之)를 넣어 약한 기운을 북돋으려고 하였어요.
한편, 약한 터의 지세를 보강해 주고, 성문에 접근하는 적을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기 위해 다른 문과 다르게 문 앞에 옹성을 쌓았어요.
<중요 역사 요약>
1396년(태조 5년) 축조
1398년(태조 7년) 완성, 흥인문(興仁門)
1451년(문종 1년) 3월 도성 고치기 시작
10월 흥인지문 정비 시작
1453년(단종 1년) 5월 완료
1869년(고종 6년) 고쳐 지음
1724년(영조 즉위년) 발인 때 상여가 나가기가 쉽게 하기 위하여, 국장도감에서 건의한 대로 흥인지문의 박석을 파내려감.
1868년(고종 5년) 흥인지문이 크게 손상되어 의정부에서 수리 요청
1869년(고종 6년) 3월 중수 완료, 풍수지리에 따라 한양 동쪽의 지기가 약하다고 하여, 그 기운을 북돋기 위하여 특별히 지(之)자를 넣어 넉 자로 이름을 고쳤다고 전해짐. 흥인지문의 현판은 4대문 중 유일하게 4글자, 정사각형으로 되어 있음.
1907년(고종 44년) 3월 흥인지문과 숭례문의 좌우측 성벽 8칸씩 헐어 전차 선로 부설, 조선총독부에 의해 보물 1호로 지정, 흥인지문을 숭례문과 함께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지나간 역사적 의미가 있는 상징물로 여겼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음.
1999년 옹성 붕괴로 8월부터 2000년 4월까지 보수, 옹성 아랫부분이 튀어나오는 '배부름 현상'이 일어나 재시공 결정, 지하철 개통 이후 지하수위가 낮아지고 지반이 침하
2002년 12월부터 2007년 8월까지 옹성 해체 지반 보강 후 복원
2015년 도로를 내면서 끊어진 문 북쪽의 도성 자리에 석재 포장 공사
<건축물 특징>
화강석으로 된 홍예문의 축석 위에 지어졌으며, 도성의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을 갖추고 있어요.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모양을 한 우진각 지붕이죠.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그 형태가 가늘고 약하며 지나치게 장식한 부분이 많아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 있어요.
또한 바깥쪽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반원 모양의 옹성(甕城)을 쌓았는데, 이는 적을 공격하기에 합리적으로 계획된 시설이라 할 수 있어요.
숭례문이 조선 초기 양식으로 지어졌으나 흥인지문은 조선 후기 양식으로 되어 있어 서로 대비 되지요.
<놀이 소개>
'동대문을 열어라'는 어린이들이 즐겨 하는 놀이, 또는 그 놀이를 하며 부르는 구전 동요를 말해요. 공식적으로 정해진 이름은 없으며 “동대문 남대문” 등으로 불리기도 해요.
멜로디는 독일의 전통 크리스마스 캐롤 "Lasst uns froh und munter sein"에서 빌려온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놀이 방법>
1. 놀이를 시작하면서 술래(‘문지기’라고도 함) 두 명을 정한다. 이때 술래를 남녀 어린이 한 쌍으로 하기도 한다.
2. 술래 두 명이 양손을 맞잡아 ‘문’을 만들면, 나머지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며 줄을 서서 앞 사람의 허리를 잡고 차례대로 ‘문’을 지나가길 반복한다.
3. 노래가 끝남과 동시에 ‘문’을 만들고 있던 술래 두 명은 맞잡은 양손을 내려 ‘문’을 닫음으로써 지나가고 있던 한 명을 가둔다. 문에 갇힌 사람은 새로운 술래가 된다.
<노랫말>
동 동 동대문을 열어라
남 남 남대문을 열어라
12시가 되면은(또는 지나면)문을 닫는다.
숙정문(肅靖門)은 한양도성 4대문 중 북쪽에 있다해서 북대문, 북문, 북정문 등으로 부르는 대문이죠. 처음에는 숙청문(肅淸門)으로, 이후 ‘정숙하고 고요한 기운을 일으킨다.’, '엄숙하게 다스린다' 는 의미로 숙정문(肅靖門)으로 불렸어요. 북방의 경계를 엄하게 하여 도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의미이지요.
숙정문은 나쁜 운을 막아주는 문이라 하여 새해가 되면 정월 대보름이 지나기 전에 삼청동 깊은 골짜기를 거쳐 숙정문까지 세 번 오르내렸다고도 해요. 그리고 장마가 지면 하늘을 맑게 해달라는 기청제, 가뭄이 심해지면 기우제를 지내는 곳이기도 했어요.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는 산 속에 있어 성문의 기능은 하지 않았고 1413년 폐쇄되었어요.
북소문인 창의문(彰義門)과 숙종 때 만든 ’지혜를 넓힌다‘는 뜻의 홍지문(弘智門)이 북대문의 역할을 대신하였지요.
1968년 1·21사태*로 청와대 경비를 위해 접근을 금지하다가, 2006년 4월부터 개방하였는데, 창의문 안내소~말바위 안내소, 숙정문 안내소 2.2km 구간은 군사작전지역으로 신분증이 꼭 필요해요.
< *1·21 사태: 북한 김일성의 명령으로 1968년 1월 21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소속의 군인 31명이 대한민국의 청와대를 기습하여 대한민국의 대통령 박정희를 제거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으로 김신조 사건이라고도 한다.>
<중요 역사 요약>
1396년(태조 5년) 9월 완공
1413년(태종 13년) 풍수학자 최양선(崔揚善)의 상소로 숙정문[觀光坊東嶺路]을 폐쇄하였으며 길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함.
1504년(연산군 10년) 숙정문을 없애고 오른쪽에 새로이 문을 세우라고 명하였으나 실제로 문을 옮겼는지 알 수 없음. 숙청문은 음양오행 가운데 물을 상징하는 음(陰)에 해당하는 까닭에 나라에 가뭄이 들 때는 기우(祈雨)를 위해 열고, 비가 많이 내리면 닫았다고 함.
1963년 1월 21일 서울성곽에 포함, 사적 제10호 지정
1968년 1·21 사태 이후 청와대 경비를 위해 일반인의 접근 금지
1976년 소실된 숙정문 목조 누각 복원, 박정희 전 대통령이 현판 글씨를 씀
2006년 4월 1일 인근의 성곽 탐방로 1.1km 구간과 함께 다시 일반에 개방
돈의문(敦義門)은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의 4대문(大門) 중의 하나로 서쪽의 대문이죠. 흔히 서대문(西大門)이라고도 부르는데, 조선 초기부터 불린 이름이에요.
돈의문은 태조 때 처음 세워졌으나 태종 13년(1413)에 만들어진 서전문(西箭門)이 서대문의 기능을 대신하였어요. 그 위치는 현재 정확히 알 수 없어요. 세종 4년(1422)에 도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면서 서전문을 닫고 새로운 돈의문을 세웠는데 현재 돈의문 터가 그 위치에요.
서울 4대문 및 보신각(普信閣)의 이름은 오행사상을 따라 지어졌어요. 이런 명칭은 인(仁: 동), 의(義: 서), 례(禮: 남), 지(智: 북), 신(信: 중앙)의 5덕(五德)을 표현한 것이었으며, 돈의문(敦義門)의 '의(義례)'는 여기서 유래한 것으로, 유교 덕목 중 ‘불의를 부끄러워하고 악한 것은 미워하는 마음’인 의(義)를 넣어 돈의문이라 지었어요. 의(義)를 북돋는 문이라는 뜻이지요.
돈의문(敦義門)은 ‘새문’, ‘신문’이라고도 불렸어요. 인근의 ‘새문안로(신문로)’나 '새문안교회' 등의 이름은 여기서 따온 말이지요.
돈의문(敦義門)은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일제는 서대문을 지나는 전차를 개통하면서 이 문을 해체하여 건축자재로 매각하였어요. 현재 돈의문 터에는 공공 미술품 ‘보이지 않는 문’이 설치되어 있어요. 그리고 2019년 8월, 104년 만에 디지털로 복원하고, 서울 돈의문박물관마을 내 돈의문체험관에서 AR‧VR로 돈의문의 옛 모습을 체험할 수 있게 되었어요.
<중요 역사 요약>
1396년 9월 완공
1413년(태종 13년) 풍수학자 최양선의 건의로 돈의문을 닫고 서전문(西箭門) 설치
1422년(세종 4년) 2월 서전문 막고 다시 돈의문을 열었음.
1711년(숙종 37년) 돈의문 새로 지었음
1915년 3월 돈의문을 헐고 도로 개설 결정, 경매로 205원 50전에 염덕기(廉德基) 목재 낙찰, 귀중한 부속물 총독부에서 관리, 6월 강제 철거 완료
2013년까지 돈의문을 원형 그대로 복원하는 계획 발표
현재 돈의문 복원은 예산 및 원형 복원 등의 문제가 겹쳐 2022년까지 중장기 과제임.
현재 서울 중구 정동 경향신문사 앞 정동사거리에 '돈의문 터' 라는 표지석이 있음.
<건축물 특징>
돌축대 한 가운데에 무지개문을 큼지막하게 내고 축대 위에는 단층 우진각지붕집의 초루(譙樓)를 세우고 둘레에 낮은 담을 설치하였고, 한양도성과 연결이 되었어요.
숭례문과 돈의문 사이에 있는 한양도성 4소문 중 하나로, 서소문(西小門)이라도 해요. 처음에는 소덕문(昭德門)으로, 이후 소의문(昭義門)이라 했어요.
일반적인 통행로이면서 광희문(光熙門)과 함께 시체를 성 밖으로 옮기는 통로로 사용했고, 문 바깥에는 사형 집행장이 있었어요.
소의문 밖에는 '칠패'라는 시장이 있었어요. 이는 한양도성 안에 있던 종로 시전, 배오개 시전과 더불어 한양의 3대 시장이었어요. 한강 연안의 마포나 서강을 통해 들어오는 곡식이나 생선이 칠패시장에 모여들었어요. 특히, 생선이 많았는데 한양도성 안으로 들어갈 생선을 미리 사두는 방법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해요.
<중요 역사 요약>
1396년(태조 5년) 9월 건립, 소덕문(昭德門), 문에는 문루가 없었음.
1738년(영조 14년) 영조가 소덕문의 이름을 고치라고 명함.
1744년(영조 20년) 8월 문루가 완성되었고, 소의문으로 개칭
1908년 9월 소의문과 숭례문 좌우의 성벽 총 77간이 헐렸음.
1914년 12월, 조선총독부에서 소의문 경매를 진행한 뒤 철거하였음.
현재는 중앙일보사 주차장 화단에 표석이 있음.
광희문(光熙門)은 숭례문과 흥인지문 사이에 있는 한양도성 4소문 중 동남쪽으로 통하는 문이에요. 처음에는 오간수문과 이간수문 인근에 있어 수구문(水口門)이라 하였지요.
한양도성 안에는 매장이 금지되었기에 도성의 장례 행렬이 통과하던 문으로 소의문(서소문)과 함께 시체가 나가는 문이라 하여 시구문(屍口門), 시신문(屍身門)이라고도 불렸어요.
병자호란(1636년) 때 인조 왕은 강화도록 피난을 가기 위해 숭례문을 찾았어요. 그러나 청나라 군대의 빠른 진격으로 숭례문을 빠져 나가지 못하고 광희문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피난가게 되요. 광희문은 원래 시체가 빠져나가는 문인데, 임금이 그런 문으로 피난을 갔다는 거예요.
<중요 역사 요약>
1396년 9월 건립
1711년(숙종 37년) 민진후가 고쳐 쌓음.
1719년(숙종 45년) 문루 건립
1928년 자금 부족으로 관리하기가 힘들다는 이유로 혜화문과 함께 총독부에서 문루 철거
1975년 11월 김응현이 쓴 현판 달고 복원
2014년 2월 17일 일반인에게 개방
<건축물 특징>
다른 한양도성의 보통 문은 홍예와 붙어 있는데, 광희문의 문루는 나무 기둥으로 연결되는 형식이었어요.
당시엔 '아무리 지독한 병마라도 수많은 원귀에 단련된 수구문에는 꼼짝도 못 할 것'이라 하여, 광희문의 돌을 갈아 만든 돌가루가 '수구문 돌가루'라는 만병통치약으로 통했었어요.
* 한양도성의 제9문, 남소문 - 광희문에서 남산 쪽으로 가다 보면 버티고개가 있어요. 이곳에 도성을 드나들 수 있는 소문이 하나 더 있었어요. 세조가 한강나루인 한남동에서 도성으로 들어오려면 산길을 돌아 광희문을 이용해야 하는 불편함으로 남산 동쪽에 작은 문을 하나 더 만들었어요. 이것이 남소문이에요. 그런데 10년이 지난 후 이곳에 도둑들이 많이 생겨서 문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적자 문을 닫았어요. 지금은 남소문 터라는 표석만 남아 있어요.
혜화문(惠化門)은 한양도성 4소문 중 동쪽에 있어 동소문(東小門)이라고도 해요. 처음에는 문 이름을 홍화문(弘化門)이라 하였다가 1483년(성종 4) 새로 창건한 창경궁의 동문을 홍화(弘化)라고 정함에 따라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1511년(중종 6) 혜화(惠化)로 고쳤지요. 혜화문은 '은혜를 베풀어 가르치는 문'이라는 뜻이에요.
북쪽 지방인 함경도로 가려는 한양 사람들은 숙정문 대신 혜화문을 많이 이용했어요. 소문인 혜화문을 지키는 군사도 30여명이나 되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혜화문을 대문처럼 이용했다는 증거이지요.
<중요 역사 요약>
1396년(태조 5년) 9월 완공
1413년(태종 13년) 풍수학자 최양선의 건의로 숙정문 폐쇄하여, 대신 창의문과 혜화문이 북문(北門) 역할.
* 출직호군(出直護軍, 문을 지키는 병사) 숫자: 소문 20명, 대문 30명, 소문임에도 불구하고 혜화문은 30명
1928년 관리가 어렵다는 이유로 광희문과 함께 철거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문루 화재, 소실
1744년(영조 20년) 8월, 문루 세우고 현판 걸어 재건
1939년 일제강점기에 석축과 홍예 파괴
1994년 복원
☞ 전해오는 이야기
일반적으로 홍예 안쪽 천장에는 용이 그려져 있어야 하나, 혜화문에는 봉황이 그려져 있어요. 옛날 이곳 주변에 새가 너무 많아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니까 이를 막기 위해 용 대신 새들의 왕인 봉황을 그려 넣은 것이라고 해요. 지네처럼 생긴 땅의 기운을 막기 위해 봉황을 닮은 닭을 그려넣은 창의문과 비교해볼 수 있지요.
창의문(彰義門)은 돈의문과 숙정문 사이에 있는 한양도성 4소문 중 하나로, 서북쪽을 지키는 문이고, 북문, 자하문으로도 불러요.
북한과 양주 방면의 교통로였으나 1416년(태종 16) 풍수지리설을 주장하는 자들이 이 곳의 통행이 왕조에 불리하다 하여 문을 닫은 채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되었다가 1506년(중종 1)에 다시 열어놓았어요.
1623년 인조반정* 때 능양군(인조)을 비롯한 의군들이 이 문을 부수고 궁 안에 들어가 반정에 성공한 곳이기도 해요. 창의문 문루에 오르면 서쪽에 현판이 하나 걸려 있는데, 인조반정에 참여한 공신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요.
< * 인조반정은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가 임금이 된 사건이에요.>
<중요 역사 요약>
1396년 9월 건립
1413년(태종 13년) 풍수학자 최양선이 이 문을 열어놓으면 궁궐과 왕조에게 액을 불러온다고 건의하여 폐쇄
1422년(세종 4년) 도성 정비 시 창의문과 숙정문 개방
1446년(세종 28년) 4월 폐쇄
1469년(예종 1년) 3월 문을 닫으라는 명이 있었다.
1623년(광해군 14년) 3월 12일 밤 홍제원에 집결한 반정군이 세검정과 창의문을 통과하여 인조반정을 일으켰음.
1741년(영조 17년) 6월 16일 문루 설치,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원형 유지
2015년 12월 2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881호로 지정되었음.
<전해오는 이야기>
대개 성문은 방향에 따라 청룡, 백호, 주작, 현무가 그려져 있거나 거북, 봉황, 기린, 용이 그려져 있어요. 이것에 따르면 북소문인 창의문에는 봉황이 그려져야 하는데, 실제로는 닭이 그려져 있어요.
인왕산에서 내려오는 산세가 흡사 지네를 닮아 지네의 독기가 문을 넘어 궁궐에 이른다 하여, 홍예문 천장에는 지네의 천적인 닭을 닮은 봉황을 그렸다고 해요.
평시에는 문을 닫아 두었다고 해요. 다만 '군사들에게는 개방하라'는 세종의 명에 따라 강무에 참여하는 군사에 한하여 통행이 허용되었고 사냥하러 나가는 왕과 왕실 종친들만이 은밀하게 이용하는 비밀의 문이 되었지요. 국가적인 공역(工役)을 수행할 때와 같이 긴요한 경우에만 성문을 열었다고 해요.
☞ 오간수문(五間水門)
오간수문은 흥인지문 옆 청계천에 건설되었던 수문으로 5개의 구멍이 있어 오간수문이라 불러요.
오간수문은 크기가 5척이나 되었으며, 각 수문마다 쇠창살로 만든 철문이 설치되어 있었어요. 이것은 물이 잘 빠져나가도록 함과 동시에 외부에서 이 수문을 통해 함부로 사람들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명종 때의 의적(義賊)으로 알려진 임꺽정이 오간수문을 통하여 달아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어요.
1907년 청계천 하천수가 원활하게 소통되고 토사가 쉽게 흘러 내려가도록 한다는 명문으로 오간수문을 뜯어버렸어요. 또 다음 해인 1908년 3월에는 훼손되어 방치된 성벽을 처리하고, 시가교통을 원활하게 한다는 명분으로 동대문 부근 성벽과 함께 오간수문의 성벽까지 헐어버리고 대신 그 자리에 콘크리트로 근대식 다리를 놓았지요. 이로써 오간수문의 원형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어요.
오늘날 사람들은 오간수문이라는 이름 대신 '오간수교' 또는 '오간수다리' 라고 부르고 있는데, 사실 이것은 맞지 않아요.
성벽을 지키거나 수문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물을 건널 수 있도록 수문과 수문 사이에 긴 돌을 놓아 사람들이 건너다닐 수 있도록 하였으나, 오간수문의 원래 기능은 이름 그대로 물이 빠져나가는 수문이었으며 다리가 아니었지요.
명칭 또한 조선왕조 500년 동안 '오간수문'이라고 불렀지 '오간수교'라고 부른 적은 없었어요.
오간수문을 오간수교라고 부르게 된 것은 일제에 의해 오간수문이 헐리고 콘크리트로 된 근대식 다리가 놓인 다음부터였어요.
일제강점기에 오간수문은 시내 전차의 주요 통로였지요.
☞ 이간수문[ 二間水門 ]
이간수문은 청계천의 오간수문 바로 남쪽에 도성의 성곽을 통과하는 수문이에요. 이 물길은 도성 밖에서 청계천 본류와 합류해요. 2개의 홍예문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오간수문의 형태를 축소한 것이지요.
일제강점기 경성운동장이 들어서면서 자취를 감추었어요.
- 출처: 한양도성박물관
- 출처: 한양도성박물관
한양도성의 성문은 보신각 종루에 매달린 큰 종을 쳐서 성문 여닫는 시각을 알렸어요. 새벽에는 33번, 저녁에는 28번을 쳤어요. 새벽에 치는 종을 바라(파루), 저녁에 치는 종을 인경(인정)이라 했는데, 민가의 대문도 이 종소리에 따라 열리고 닫혔다고 해요. 이만큼 성문의 열고 닫는 시각이 도성민의 생활 리듬을 지배한 셈이라 할 수 있겠지요.